클래식 음악

표절로 만들어진 헨델의 걸작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파죨리 클래식 2024. 12. 1.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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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현재 '메시아'나 '유다스 마카베우스'와 더불어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며 현재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에서도 상당히 자주 연주되는 곡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오라토리오는 합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과 같은 쟁쟁한 후배 작곡가들도 합창곡을 작곡할 때 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을 많이 참조했다.  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멘델스존의 편곡판도 존재하는데 나름의 매력이 있어서 종종 연주된다. 

그런데 이 곡은 작품성과 별도로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표절이 난무하는 곡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제부터 그 실체를 들여다보자.

1. 작곡 배경

헨델은 1710년대부터 영국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렸는데 1730년대 중반 이후 영국에서 이탈리아식 오페라의 인기가 사그라들면서 오페라 공연에 대한 열기와 수익이 예전같지 않았다.  이렇게 분위기가 바뀐 자세한 이유는 기회 닿으면 다루도록 하고, 여튼 헨델 입장에서는 오페라를 대체할 음악 장르를 발굴해야 했는데 이 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오라토리오였다. 오라토리오는 가사가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 오페라와 달리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영국 대중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고 값비싼 무대장치나 의상도 필요 없었다. 또 신성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오페라적으로 각색하기 힘든 종교적인 주제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었다.  이런 장점 덕분에 오페라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작곡되고 공연될 수 있었다. 

그래서 헨델은 1738년 '사울'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두 작품을 시작으로 오페라를 버리고(?) 오라토리오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사울을 작곡한지 4일만인 1738년 10월초에 제2부 부터 착수하여 단 4주 만인 11월 초에 전곡을 완성하였고, 이듬해인 1739년 4월 4일 런던 왕립극장에서 초연하였다. 한편 초연때 이 오라토리오의 1부의 음악은 캐롤라인 여왕의 장례식 앤섬(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 HWV 264)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으며 자신의 오르간 협주곡 '뻐꾸기와 나이팅게일(Cuckoo and the Nightingale, HWV 295)의 느린 두 악장을 간주곡으로 활용했다. 

이 곡은 초연 당시에는 반응이 그리 열광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헨델은 두 번째 이후 공연에서는 암울한 분위기를 가진 1부를 빼버리고 독창과 이중창을 추가해서 합창 일변도의 음악에 변화를 주었으며 그 덕분에 이후 공연에서는 좀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곡이 제대로 유명해지고 자주 연주된 것은 헨델 사후 시간이 좀 지난 후부터이며 헨델 당시에는 특별히 주목받는 곡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곡은 헨델 생전에 조금씩 수정이 가해지면서 나름 여러 번 공연되었다. 

이런 공연 이력 덕분에 현재에도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을 공연하거나 레코딩을 할 때 선곡이 상당히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1부는 대체로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전주곡만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HWV 295의 오르간 간주곡도 지휘자의 재량에 따라 포함되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한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레코딩 예시 - 1부는 완전히 생략되었고 HVW295의 오르간 간주곡은 포함되었다.


2. 작품에 대해 

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특정 대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영어 성경(KJV)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주로 출애굽기와 시편에 있는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이 오라토리오는 헨델의 다른 오라토리오와 달리 특정한 등장인물이 없으며 일관된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이고 그들이 겪는 고난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이를 극복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처럼 특정한 캐릭터도 스토리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곡이 합창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복합창(이중합창)이 18곡으로 전체 곡의 절반이 훨씬 넘는다. 그나마 두 번째 공연부터 독창 아리아 4곡과 이중창 3곡을 추가했으나 이 역시 특정 등장인물의 노래가 아니라 일종의 나레이션 역할을 하고 있다.

1부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집트에서 재상이 된 요셉(Joseph)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장송곡인 캐롤라인 여왕의 장례식 앤썸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고 추모의 대상만 캐롤라인 여왕에서 요셉으로 바꾼 것이며 부제도 장례식 앤썸의 부제인 '시온으로 가는 길은 슬프도다(The ways of Zion do mourn, 예레미아 애가 1장 4절에 나오는 구절)'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1부는 본질이 장송곡인만큼 곡 전반에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가 깔려 있는데, 현재 이 오라토리오를 공연할 때는 곡 전체의 분위기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헨델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1부의 첫 합창곡 - 캐롤라인 여왕의 장례식 앤섬의 첫 합창곡을 그대로 가져왔다.

2부는 엑소더스(Exodus)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출애굽기 1~15장에 나오는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인들이 모세를 대장으로 삼아서 탈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등에 업은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10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를 갈라서 이집트군의 추격을 물리치는 부분까지가 2부의 내용이다.  3부는 모세의 노래(Moses' song)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의 기쁨과 신에 대한 감사가 주된 내용이다. 2부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출애굽기와 시편에 나와 있는 구절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이집트의 이스라엘은 합창 위주로 진행되는 오라토리오이기 때문에 헨델식 합창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중합창에는 헨델 특유의 절묘함이 발휘되고 있으며 푸가나 캐논 등의 대위법이 자주 응용된다. 또 오페라 작곡가답게 화려하고 유려한 선율이 돋보이며 가사처리도 일품이다.

 

그런데 이 오라토리오는 관현악도 합창 못지 않게 인상적인데,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 앞에서 행하는 열 가지 재앙에서 개구리가 뛰어들고 파리떼들이 날아다니는 장면, 우박과 불덩이가 쏟아지는 장면,  이스라엘인들을 추격하는 이집트 군인들의 말발굽 소리, 갈라졌던 홍해가 이집트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장면 등에서 생생한 관현악 묘사가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또 팀파니를 활용해서 극적인 장면에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묘사적인 수법을 빗대서 이 오라토리오를 '회화적인 오라토리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3. 표절로 점철된 명작(?)

이처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작품 자체만 보면 찬사를 아낄 이유가 없는 명작이지만 이 곡이 오늘날 유명한 또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오라토리오 전반에 걸쳐 다른 작곡가의 곡을 대거 표절했다는 것이다. 물론 헨델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오늘날과 같은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곡을 가져다 쓰는 것을 딱히 범죄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관행으로 여겼지만 문제는 그 정도이다. 

이 오라토리오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음악 가운데 가장 표절도가 높은 작품일 것이다.  헨델의 다른 작품에서도 남의 작품이나 자신의 이전 작품을 베낀 경우가 많지만 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처럼 표절로 일관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어느 정도냐면 (1부는 논외로 하고) 2부 3부 전체 30여곡 가운데 헨델 본인이 직접 작곡한 곡은 몇곡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문헌이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차용/인용 했다거나 패러디했다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좋게 표현한 것이고 본질은 결국 표절이다. 물론 헨델이 본인 스타일로 편집과 각색을 했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성을 갖게 된 것이지만 여튼 남의 곡을 대거 가져다 쓴 것은 현재 관점에서 보면 표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오라토리오는 특히 두 명의 작곡가로부터 곡을 많이 가져왔다. 첫번째로 언급할 작곡가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 1639~1681)로 바로크 중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명이다. 헨델은 스트라델라의 결혼 축하 음악(wedding serenata)인 qual prodigio è ch'io miri(내가 명예롭게 여기는 것)에서 5곡을 가져와서 모세가 일으키는 10가지 재앙을 묘사하는 부분에 주로 사용했다.

- "He spake the word," 
- "He gave them hailstones," 
- "But as for his people/He led them," and 
- "And believed the Lord" 
- "The people shall hear all the inhabitants of Canaan." 

백문이 불여일청, 스트라델라의  qual prodigio è ch'io miri 중의 신포니아(Sinfonia)와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의 'He Spake the Word(그가 말씀하셨다)'를 비교해서 들어보자.

스트라델라의  qual prodigio è ch'io miri 중의 Sinfonia
헨델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의 He Spake the Word

 

두 번째로 언급할 작곡가는 역시 이탈리아 출신의 디오니기 에르바(Dionigi Erba, 1692-1730)라는 좀 생소한 작곡가이다. 헨델은 에르바의 마그니피카트에서 무려 9곡을 차용했으며 이 9곡은 2부와 3부의 여러 부분에 활용되었다. 원곡을 어떻게 바꿨는지 비교해 보기 위해 에르바의 마그니피카트를 들어보고 싶지만 에르바가 사실상 잊혀진 작곡가인데다 마그니피카트 악보가 최근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연주된 적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레코딩이나 유튜브 영상이 없는 상황. ㅠㅠ

 

- "He rebuked the Red Sea" 
- "The Lord is my Strength" 
- "He is my God" 
- "The Lord is a Man of War" 
- "The depths have covered them/Thy right Hand, o Lord" 
- "Thou sentest forth thy wrath" 
- "And with the blast of thy nostrils" 
- "Who is like unto Thee" 
- "Thou in thy mercy"

 

여튼 헨델은 두 작곡가의 곡으로부터 무려 14곡을 차용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심각한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래에 언급되는 다섯 작곡가들의 곡에서도 최소 한곡 이상을 차용했다. 

-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 요한 카스파르 케를(Johann Caspar Kerll,)
-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우리오(Francesco Antonio Urio)
- 니콜라우스 아담 스트룽크(Nicolaus Adam Strungk)
-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우(Friedrich Wilhelm Zachow)

케를의 오르간 칸초나 4번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 “Egypt was glad when they departed”(그들이 떠나자 이집트는 기뻐했다)를  비교해서 들어보자. 

요한 카스파르 케를 - 오르간 칸조나 4번 
헨델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 “Egypt was glad when they departed”

 

이처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광범위하게 다른 작곡가의 곡을 가져다 쓰고 있다. 전체 곡 중에 그나마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곡은 맨 마지막곡인 "Sing ye to the Lord(주님께 노래하라)"를 비롯한 몇몇 합창곡과 나중에 삽입된 독창/이중창 정도인데, 이 곡들도 헨델이 온전하게 작곡한 곡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다른 작곡가의 곡을 차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4. 그렇다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의 진정한 가치는?

작품성과 별도로 이 곡의 표절 수준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비난의 대상이 될만하다. 아무리 당시에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지만 한두곡도 아니고 중요한 곡 대부분을 남의 작품에서 베끼는 행위는 심지어 헨델 시절에도 충분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헨델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1738년)에는 그가 곡을 베꼈던 작곡가들은 라모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한 상황이었으며 또 그가 베낀 곡들이 딱히 유명한 곡이 아니었기 때문에 표절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사실 이 곡의 표절 문제가 제대로 불거진 건  20세기 후반 이후였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이 곡을 공연할때 종종 제목을 헨델-에르바-스트라델라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표절여부가 알려진 현재에도 이 곡의 인기는 여전하다. 여러 작곡가의 곡을 모아 짜깁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헨델식 합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여러 오라토리오 중에서도 특별한 매력이 있다.

 

한편으로 이 곡은 윤리적인 문제와 별도로 음악학도와 음악학자들에게 새로운 흥미거리를 던져 주기도 했다. 남의 작품에서 베낀 선율을 어떻게 자신의 스타일로 바꾸었고 어떻게 뛰어난 합창음악으로 변화시켰는지 수법을 탐구하는 것은  음악적으로 꽤 흥미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베낀 곡으로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만들기는 정말 어렵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꽤 희소가치가 높은(?) 작품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 곡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을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에 가장 좋아하는데,  매력적인 합창과 더불어 이 곡에 사용된 각종 음악 수법들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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