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연주자 입장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이 지옥의 난곡인 이유

파죨리 클래식 2024. 12.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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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피아노곡은 피아노 전문가들이 작곡한다 

피아노가 본격 독주악기로 각광을 받은 이후에 작곡된 난곡(難曲)들은 거의 예외없이 피아노에 능통한 연주자들이 작곡한 곡이다. 모차르트부터 시작해서 베토벤,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에프 등등 피아노 분야에서 걸작을 남긴 작곡가들은 모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거나 연주자 수준의 피아노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 작곡가들은 당연히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손가락을 원활하게 움직이면서 연주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어렵기는 해도 연주가 아예 불가능하거나 손가락이 마구 꼬이는 경우는 발생하지는 않는다. 다만 라흐마니노프처럼 자주 10도 이상으로 손을 벌려야 되는 곡을 써서 손이 작은 피아니스트들의 비명을 자아내는 경우는 있지만;;;;

2. 피아노에 대해 잘 몰랐던 슈베르트

반면 피아노곡을 많이 쓴 작곡가 중에 의외로 피아노에 능숙하지 않은 작곡가도 드물지만 있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하이든과 슈베르트이다. 그래도 하이든은 전문 연주자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름 피아노(또는 하프시코드)를 잘 쳤기 때문에 그의 피아노곡에서 이상한 주법이 등장하거나 연주가 곤란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이든의 피아노곡은 대체로 기교적으로 어렵지 않고 수법도 무난한데,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기 때문이다. 

반면 슈베르트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슈베르트는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했다(사실 피아노 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슈베르트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긴 했지만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으며 작곡법도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잠시 배운 것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가난하게 살았던 슈베르트에게는 피아노가 없었다. 그나마 죽기 1년전에 겨우 중고 피아노를 장만했으며 그 전에는 특별한 악기 없이 그냥 흥얼거려가며 작곡했다. 종종 집에 있는 기타로 음을 잡거나 친구의 집에 있는 피아노를 활용해서 작곡하기도 했지만 상당수의 곡은 이런 것조차 없이 그냥 머릿속에서 상상해가며 작곡해야 했다. 

프란츠 슈베르트


그래서 슈베르트는 피아노곡을 작곡할 때 연주법이나 연주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머리에서 흘러 나오는 악상을 그대로 악보로 옮겨 놓았는데, 이게 그의 곡을 연주할 때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연주자 입장에서는 운지하기 곤란한 음형이 많고 뜬금없는 악상이 자꾸 튀어나오기 때문에 연주와 해석에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된다.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D780 3번 - 조성진

 

그렇다고 해서 고생한 만큼의 연주효과를 얻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연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진짜 문제인데, 연주 난이도는 턱없이 높은데 비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노랫가락처럼 아름답고 편안하게 들릴 뿐 딱히 기교가 돋보이거나 화려한 음향효과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은 최근까지도 연주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으며 재평가를 통해 음악성을 인정받은 현재에도 연주 빈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한편으로 악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슈베르트의 곡은 권하지 않는다. 연주 방법이 통상적인 연주법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초를 익히려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3.  하지만 그래서 슈베르트의 음악이 특별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이자 장점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슈베르트는 피아노에 능통했던 전업 작곡가들과 달리 오로지 자기 내면에 충실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음악인생 내내 윗사람의 등쌀에 시달렸던 바흐, 음악인생 상당 기간을 윗사람의 등쌀에 시달렸던 하이든,  의뢰인이나 청중들을 의식해야 했던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선배 작곡가들과 달리 슈베르트는 특정한 연주자나 의뢰인을 위해 곡을 쓰지 않았고 딱히 콘서트홀 연주를 염두에 두고 곡을 쓰지도 않았으며 생전에는 출판된 곡도 몇 없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음악은 연주를 하는 사람들은 죽어나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노래처럼 귀에 착 감기는 특징이 있는데, 연주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화려한 기교나 복잡한 전개 수법 대신 자신의 의식세계를 투영한 풍부한 서정성과 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말년의 작품들은 더욱 특별하다 

앞서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에 자신의 피아노를 장만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죽기 직전에 쓴 그의 피아노곡들은 이전의 피아노곡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아니즘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후기 소나타'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19, 20, 21번 피아노 소나타가 대표적인데, 모두 규모가 크고 좀더 피아니스틱(?)하게 연주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21번 소나타는 베토벤과는 또 다른 슈베르트 특유의 음악성이 구현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1악장 - 크리스티안 짐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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