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슈베르트 마왕에 묻혀버린 다른 작곡가들의 마왕에 대해 알아보자

파죨리 클래식 2024. 10. 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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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덴마크 지역의 전설을 바탕으로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82년 창작한 시이며 상당히 비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시의 독일어 제목인 "Erlkönig"는 영어로 Elfking, 즉 엘프의 왕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현재 게임과 환타지 소설 등에서는 엘프가 주로 큰 키와 큰 귀를 가진 선한 캐릭터로 묘사되지만 당시 독일지역에서 엘프는 무섭고 사악한, 일종의 악귀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이 시는 당시 독일권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다수의 작곡가들이 이 시를 가사로 한 가곡의 작곡을 시도했다. 사실 이 시를 음악으로 옮기는 작업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은데  가수 한명에게 아빠, 아들, 마왕, 내레이션 등 4명의 역할을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4명의 가수를 동원하기도 어려운 것이 연주시간 4분 남짓한 곡을  4명이 부르는건 일종의 인력낭비인데다 아들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소년 가수가 필요하기 때문;;;;  다만 최근에는 실제로 두 명 이상의 성악가 독창으로 작곡된 곡을 역할 분담해서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작곡상의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워낙 시의 임팩트가 강한 탓에 슈베르트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마왕을 가사로 한 가곡 작곡에 도전했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마왕이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다른 마왕은 모조리 묻히는 사태가 발생해 버렸으며 이런 상황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한 마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참고로 여기 소개된 마왕 외에도 더 많은 마왕이 있다고 한다.

1. 슈베르트의 마왕(D. 328)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 중에 이 곡을 모르는 분은 (설마)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마왕의 존재감을 아예 없애버릴 정도로 압도적으로 유명한 마왕이며 독일 가곡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슈베르트는 이 기념비적인 가곡을 18살에 작곡했는데 마왕보다 1년 전에 작곡한 가곡 실 잣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 D.118)과 더불어 독일 낭만주의 가곡을 탄생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대로 쓰자면 정말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품이지만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곡인데다 이 글의 주 목적이 대중들에게 생소한 마왕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음악적인 관점에서 개략적인 분석만 하고 넘어가겠다. 

 

슈베르트의 마왕 - Daniel Norman(Tenor), Sholto Kynoch(Piano)

기본적으로 이 가곡은 아버지, 아들, 마왕, 나레이션 네 등장인물을 아주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가사의 내용에 딱 어울리는 선율과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슈베르트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이 바로 가사에 정말 잘 어울리는 선율을 창작하는 능력인데 마왕에서도 이런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또 일종의 라이트모티브?와 비슷한 기법도 등장하는데, 아빠, 아들, 마왕 각각에 해당되는 주제선율이 있어서 해당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같은 주제선율이 사용되면서 가사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기 때문에 가사를 몰라도 음악을 들으면 지금 누가 등장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런 특징으로 인해 구성 측면에서 론도 형식의 작품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가곡의 백미는 바로 반주이다. 슈베르트 가곡의 특징 중 하나가 반주와 노래의 완벽한 콜라보인데 특히 슈베르트의 마왕은 노래보다 반주가 더 돋보이는 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반주가 인상적이다. 곡 전반에  말발굽 소리를 표현하는 트레몰로를 지속시키면서 곡 전체의 긴장감과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당시 기준에서는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반주가 꽤 길게 진행되는 것도 나름 특별했는데  그만큼 슈베르트가 반주의 작곡에도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속적인 옥타브 트레몰로는 대단한 기교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반주자의 체력과 손목힘을 많이 소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사실 이런 수법은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슈베르트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많은 음악 전문가들은 슈베르트가 피아노에 정통한 작곡가였다면 피아노 반주를 이와 같은 노동 일변도(?) 스타일로 작곡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슈베르트는 악기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악기의 연주법이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기악곡은 악기의 특성을 무시하고 작곡된 경우가 많다. 이런 난점 때문에 슈베르트 시절보다 악기와 연주기술이 훨씬 발달한 오늘날에도 연주자들이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할 때는 애를 많이 먹는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연주자가 해결할 문제이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마왕 반주처럼 악기에 대한 이해 부족이 오히려 악기를 초월한 음향효과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니 소개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 다른 작곡가의 마왕을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2. 카를 뢰베의 마왕
카를 고트프리트 뢰베(Johann Carl Gottfried Loewe, 1796~1869)는 슈베르트와 동시대에 태어난 독일의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자이다. 뢰베도 꽤 많은 가곡을 남겼으며 합창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종교음악이나 합창곡도 다수 남겼다. 현재 뢰베는 이 마왕의 작곡가로만 알려져 있는데 문제는 이 유일한 대표작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ㅠㅠ  

카를 뢰베의 마왕 - 고병준(바리톤), 박수호(피아노)

뢰베는 이 곡을 슈베르트의 마왕이 작곡된지 3~4년 후에 작곡했는데 당시에는 슈베르트의 마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곡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뢰베의 마왕은 음악적으로 슈베르트의 마왕과 상당히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마왕의 대사는 의도적으로 여린 음으로 처리해서 마왕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환상에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아들의 대사는 강렬하고 긴박하게 처리해서 불안함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만 캐릭터별로 같은 주제 선율을 사용하는 것은 슈베르트의 마왕과 비슷하다.

반주도 나름 인상적인데  슈베르트가 말발굽 소리를 트레몰로로 처리한 반면 뢰베는 트릴로 묘사했다. 트레몰로에 비해 강렬한 느낌은 다소 떨어지지만 반주자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연주하기 편한, 좀더 피아니스틱한(?) 묘사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뢰베의 마왕은 만만찮은 음악성을 지닌 훌륭한 가곡이다. 그렇지만 슈베르트의 마왕의 위세에 눌려 거의 잊혀진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21세기 이후 이 가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독창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종종 채택되고 있다.

 

3. 베토벤의 마왕(WoO 131, Hess 148)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아는 그 악성(樂聖) 베토벤도 마왕을 작곡했다.  다만  작곡을 하긴 했는데 아쉽게 완성을 하지는 못했다.  작곡 시기는 대체로 1795~1796년 사이로 보고 있는데 몇몇 학자들은 이보다 한참 뒤인 1805년 이후로 추정하기도 한다. 작곡가 본인이 생전에 이 곡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곡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베토벤이 초창기 시절에  각종 음악 수법을 실험한 습작을 많이 남겼으며 이 중 상당수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마왕도 나름 이런저런 음악적 구상을 시도해 보다가 중단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베토벤의 마왕 - Paul Armin Edelmann(Baritone), Bernadette Bartos(Piano)

이 곡의 존재는 베토벤 사후에도 한참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19세기 말 독일의 음악 학자 라인홀트 베커(Reinhold Becker, 1842-1924)가 악보를 발굴하면서 비로소 빛을 보았다. 베커는 빠진 부분이 많은 이 곡을- 연주 가능한 버전으로 완성해서 1897년에 발표했다. 베커가 고심해서 복원을 하긴 했지만  작곡되지 않고 누락된 부분이 전체 곡의 40%에 달하기 때문에 빠진 부분을 어떻게 모두 채워 넣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베커의 완성본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완성본을 구성해서 발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아쉽게도 현재까지는 확실하게 베커의 판본을 넘어설만한 완성본은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원본에 최소한만의 가필을 해서 복원한 짐머(Mark S. Zimmer) 판본 정도가 종종 언급된다.

베커의 완성본은 작곡가 본인이 완성한 곡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성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여튼 음악적으로는 나름 흥미로운 곡인데,  이 곡이 슈베르트나 뢰베의 마왕보다 20년 정도 일찍 작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이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곡수법을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마왕에서도 4명의 캐릭터별로 특징적인 선율과 분위기가 부여되고 있으며 피아노 반주에서 셋잇단음표로 말발굽 소리를 표현하면서 곡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다만 아무래도 작곡 시기가 시기인만큼 슈베르트나 뢰베의 마왕에 비해 세련미는 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4. 루이스 슈포어의 마왕

 

루이스 슈포어 또는 독일식으로 루트비히 슈포어(Louis Spohr or Ludwig Sphor, 1784-1859)는 고전파 후기와 낭만파 초기에 걸쳐서 활동했던 독일 태생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이다. 생전에는 꽤 잘나가는 작곡가이자 연주자였지만 작품 성향이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사후에 금세 잊혀졌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잘 연주되지 않는다. 

슈포어의 마왕 - Cecilia Fontaine(Mezzosoprano) Marie-Helene Leonhardi(Violine) Aida Maldonado(Piano)

이 루이스 슈포어도 괴테의 마왕을 바탕으로 한 가곡을 작곡했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답게 반주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곡의 작곡연대는 슈베르트 마왕의 작곡시기와 비슷한 1815년 경으로 추정된다. 다만 출판은 그의 생애 말년인 1855년에 이루어졌는데 6개의 가곡으로 구성된 가곡집의 4번째 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작곡시기 자체는 슈베르트의 마왕과 비슷하지만 슈포어가 슈베르트보다 한세대 전의 작곡가인데다 성향 자체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슈베르트의 마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풍스러운 스타일을 갖고 있다.

슈포어의 마왕도 나름 가사에 걸맞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지만 슈베르트나 뢰베의 마왕에 비해서는 확실히 극적인 표현력이 떨어진다. 피아노 반주도 곡의 분위기를 따라가는 대신 일정한 선율과 리듬으로 노래를 보조해 주는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바이올린 연주자답게 바이올린 오블리가토는 꽤 훌륭한데, 특히 노래를 마친 후에 곡이 바로 끝나지 않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종의 애가를 연주하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별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마왕과 비교 차원에서 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5.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의 마왕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Johann Friedrich Reichardt, 1752-1814)는 생전에는 독일식 코믹 오페라인 징슈필 작곡가로 나름 유명했지만 현재는 사실상 잊혀진 작곡가이다.  라인하르트가 마왕을 작곡한 시기는 대략 1790년대로 추정된다.

라이하르트의 마왕 - Alexander cappellazzo(Piano & Baritone)

라인하르트의 마왕은 유절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일정한 선율이 계속 반복된다. 노래와 반주 모두 특별히 언급할 요소가 없는 평범한 가곡으로  그의 다른 곡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그나마 슈베르트의 마왕 덕분에 언급이라도 되고 있으니 슈베르트에게 감사해야 될 것 같다.

 

6.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의 마왕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마왕과는 상당히 다른 마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1961년생 캐나다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아믈랭(Marc-André Hamelin)이 2007년 작곡한 12개의 연습곡 중 8번의 제목이 '괴테의 마왕(Erlkönig, after Goethe)'이다.  

아믈랭의 마왕 - 작곡자 자신의 연주

독주곡이긴 하지만 괴테의 시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기 때문에 마왕 가사를 바탕으로 한 노래나 낭송을 붙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이렇게 기교가 난무하는 난해한 피아노곡을 노래 반주로 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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