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작곡가

헨델의 애증의 두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초니와 파우스티나 보르도니

파죨리 클래식 2024. 10. 1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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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은 1710년 독일 하노버 선제후국의 궁정악장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유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영국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제대로 사의 표명도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도망(?)을 쳤다.  사실 헨델뿐만 아니라 대륙의 많은 오페라 세리아 작곡가들과 가수들이 이 영국의 오페라 열풍을 보고  돈과 명예를 얻을 목적으로 영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오페라도 마음껏 보고 공연 수익도 얻을 생각으로 합심해서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라는 일종의 오페라 공연 회사를 만들었다. 

 

이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는 헨델을 비롯해서  아틸리오 아리오스티(Attilio Ariosti)나 조반니 보논치니(Giovanni Bononcini) 같은 쟁쟁한 오페라 작곡가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막대한 자금력으로 유럽 전역에서 당대 최고의 연주자와 가수들을 사재기했다. 헨델 본인도 당시 영국을 강타했던 남해회사 주식 거품사태가 발생했을 때 큰 돈을 번 상황이었기 때문에 씀씀이를 아낄 필요가 없었다.

 

1. 헨델에게 온 최고의 두 소프라노 

 

이 때 영국 사람들에게 가장 눈에 띄었던 가수가 바로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와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였다. 최고의 아이돌 가수로 유럽 전역에 인기를 끌고 있었던 두 소프라노는 당대 오페라 작곡가들의 창작의 원천이 되었던 동시에 비싼 몸값과 높은 콧대로 유명했다.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1살 차이로 연배가 비슷했고(심지어 사망한 해도 비슷하다) 데뷔를 똑같이 베네치아에서 했는데, 그래서인지 라이벌의식도 상당히 강했다. 다만 두 사람의 노래 스타일은 상당히 달랐는데 쿠초니가 강렬한 음색과 완벽한 기교로 하이 C(C6) 이상의 초고음도 어려움 없이 구사하는 전형적인 콜로라투라형 소프라노였던 반면 보르도니는 음역대가 상대적으로 낮은 메조 성향인 대신 극적이고 호소력 넘치는 표현력이 일품이었으며 무대에서의 연기력도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 작곡가들이 두 가수를 위해 작곡한 곡을 비교해 보면 이런 성향 차이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프란체스카 쿠초니(왼쪽)과 파우스티나 보르도니


쿠초니가 1723년에 먼저 런던에 왔고 보르도니는 쿠초니의 승승장구를 보고 약 3년 뒤에 런던에 왔다. 이름만 알려져 있던 두 명가수가 몸소 영국에 오자 영국 사람들은 열광했다. 쿠초니가 공연할 때 입었던 의상이 런던의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보르도니가 런던에 온 직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두 가수의 팬덤이 생겼고 언론들은 연일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두 가수가 라이벌의식이 상당히 강했던 만큼 두 가수의 팬덤 역시 사이가 매우 나빴고 심지어 언론도 두 패로 나뉘어서 한쪽은 그냥 칭송하고 다른 쪽은 그냥 헐뜯었다. 

속사정이야 어찌 됐건 두 가수의 팬덤과 화제성은 결과적으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높였기 때문에 왕립 음악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나쁠게 없었다. 다만 오페라 작곡가들은 두 가수를 오페라에 출연시킬 때 가수의 자존심과 팬덤을 의식해서 배역의 비중과 등장시간을 똑같이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리아의 높낮이와 음표수까지 비슷하게 맞추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헨델은 쿠초니와 보르도니가 함께 등장하는 오페라를 5개 작곡했는데 이들 오페라에서 쿠초니와 보르도니가 맡았던 역할을 비교해 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2. 두 가수가 함께 출연한 공연에서 난동이 벌어지다

 

두 가수의 팬덤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는데,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1727 6월 6일에 헨델의 동료 작곡가 보논치니는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아스티아나테(Astianatte)에 쿠초니와 보르도니를 같이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관중들은 두 패로 갈라져서 소란을 피웠다. 이들은 자기 가수를 응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 가수가 나오면 야유를 퍼부으면서 도발을 했는데 점점 분위기가 격해지다가 급기야 큰 패싸움으로 이어졌다. 악명 높은 영국 훌리건(hooligan)의 원형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나테 초연때 쿠초니가 불렀던 Deh! Lascia o core

 

 

당시 공연장에는 두 가수가 동시에 출연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던 캐롤라인 왕세자빈(후에 남편이 조지 2세가 된다)이 있었기 때문에 이 꼴사나운 소동의 여파는 더욱 컸다.  소동 이후에 공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매체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데, 패싸움 때문에 그대로 중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찌어찌  수습해서 공연을 마무리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무대에서 가수들끼리 감정이 상해서 말다툼을 벌이다 결국 머리끄덩을 잡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면서 이 소동이 시작됐다고 되어 있다. 이 두 여가수의 난투극에 대한 소문은 금세 영국 전역에 퍼질 정도로 유명해졌으며 심지어 영국 밖까지 퍼졌다. 이탈리아식 오페라의 유행이 끝난 후에도 이 사건은 꽤 오랫동안 여러 매체에서 회자되었으며  심지어 현재에도 바로크 오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이 사건이 종종 언급된다. 

쿠초니(왼쪽)과 보르도니의 싸움을 풍자한 그림

 

다만 현재는 두 가수의 난투극을 근거 없는 루머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최초로 이 싸움을 보도한 언론들의 기사 내용을 보면 기자가 직접 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풍문으로 전해 들은 것들이다.  게다가 두 가수는 그렇게 교양없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사건 이후에도 여러 오페라에서 같이 무대에 올랐는데, 진짜로 머리끄덩을 잡고 싸웠다면 계속 같이 출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두 사람이 라이벌의식이 강했다는 이야기 자체도 과장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두 사람은 영국에서도 영국을 떠난 후에도 종종 같이 무대에 올랐으며  딱히 사이가 나빴다거나 싸웠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3. 이후

여튼 왕세자빈까지 참석한 오페라에서 폭동에 가까운 소란이 벌어지자 왕립 음악 아카데미는 한동 공연중단 조치를 받으면서 수익을 올릴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1728년 초에는 두 가수의 싸움을 모티브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비꼬는 일종의 패러디 음악극인 '거지의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런던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거지의 오페라의 흥행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에 직격탄을 날렸다.  잇따른 악재와 오페라의 흥행 부진으로 왕립아카데미의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고 이는 쿠초니와 보르도니를 비롯한 가수들의 이탈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결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는 막대한 빚을 견디지 못하고 1729년 초에 해체되었다(다만 해체 즉시 헨델에 의해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가 설립됐다).

영국을 떠난 쿠초니와 보르도니의 이후 행보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쿠초니는 영국을 떠난 후 몇년 후에 다시 영국에 진출했는데 이 때는 그 유명한 파리넬리가 영국 오페라계를 꽉 잡고 있어서 이전처럼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한편 쿠초니는 지우세페 산도니(Giuseppe Sandoni)라는 작곡가겸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일찌감치 결혼했는데 영국에 같이 왔다가 영국을 떠난지 얼마 후에 별거했으며 공식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평생을 따로 살았다. 그래도 가수로서는 한동안 계속 승승장구했지만 특유의 낭비벽 때문에 결국 경제적으로 파산했으며 말년에는 가난에 허덕이다가 1778년 볼로냐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반면 보르도니는 영국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며 주로 이탈리아(특히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다. 1731년에는 2살 연하의 오페라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Johann Adolf Hasse)와 결혼해서 그의 오페라에 단골로 출연했으며 자신의 두 딸도 가수로 키웠다. 당시 하세는 이탈리아에서 잘나가는 오페라 작곡가였기 때문에 꽤 많은 돈을 벌었으며 덕분에 보르도니는 은퇴 후 1781년 사망할 때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4. 헨델을 힘들게 했던 두 가수 

 

쿠초니와 보르도니 두 가수는 명성이 높았던 만큼 의전에도 상당히 공을 들여야 했다. 특히 쿠초니는 다혈질인데다 곡이 마음에 안들면 작곡가에게 대놓고 수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때문에 만만찮게 한성격 하는 헨델과 자주 부딪쳤다.

 

헨델과 쿠초니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쿠초니가 헨델의 오페라 리허설에서 헨델이 지시한 방식으로 부르지 않고 애드립을 잔뜩 넣어서 부르자 헨델이 '또 그 따위로 부르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쿠초니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자기 마음대로 부르자 화가 폭발한 헨델이 진짜로 그녀를 붙잡아서 창밖으로 던지려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고 겁에 질린 쿠초니는 그 때부터 헨델의 지시를 잘 따랐다고 한다. 물론 이 일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곡가 입장에서 쿠초니가 매우 다루기 힘든 가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

그래서인지 헨델은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한 후에는 두 가수와 달리 유순한 성격을 가진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Anna Maria Strada)라는 가수를 영입했다. 성격만 좋은게 아니라 노래 실력도 앞서의 두 가수 못지 않게 뛰어났다. 문제는 그녀의 외모였는데, 못생긴데다 키가 작고 뚱뚱하기까지 해서 정말 볼품없었다고 한다(오른쪽 그녀의 초상화는 정말 심하게 보정을 한 것이다 ㅠㅠ).  당시 언론이 그녀에 대해 노래는 정말 잘하는데 외모가 몰입을 방해한다고 언급했을 정도. 그래서인지 스트라다는 쿠초니나 보르도니같이 주목을 받지는 못했고 팬덤도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델이 계속 그녀를 중용한 것을 보면  앞서 쿠초니와 보르도니 두 가수에게 제대로  학을 뗀 것으로 보인다.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가 불렀던 헨델의 파르테노페 중 2막의 아리아 "Qual farfalletta(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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