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작곡가

비발디의 영혼의 가수였던 안나 지로

파죨리 클래식 2024. 10. 2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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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헨델의 애증의 두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았다. 

 

헨델의 애증의 두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초니와 파우스티나 보르도니

헨델은 1710년 독일 하노버 선제후국의 궁정악장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유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영국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제대로 사의 표명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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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는 비발디의 애증이 아닌 영혼(?)의 가수 안나 지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 수수께기의 인물 안나 지로 

비발디의 인생을 거론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메조소프라노/콘트랄토 가수 안나 지로(Anna Girò, Angela Maria Anna Giraud)이다. 안나 지로는 가수 경력 대부분을 비발디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부터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최근에도 비발디의 연인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안나 지로가 활동할 당시의 별명이 안니나 델 프레테 로소(l'Annina del Prete Rosso 또는  l'Annina della Pietà), 즉 '붉은 머리 사제의 안니나'였는데, 여기서 붉은 머리 사제는 바로 비발디를 가리킨다. 또 이런 소문 때문에 그녀가 비발디의 후광으로 실력이 부풀려진 3류급 가수라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다. 
 

붉은 머리의 사제 안토니오 비발디


기본적으로 안나 지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수수께끼의 인물인데, 일단 생몰연대가 불확실하다. 또 그녀는 초상화도 남기지 않았으며 외모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어서 그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본인이 남긴 편지나 글도 매우 적어서 성격이나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  현재까지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주로 가수 경력과 약간의 개인사 정도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안은 간접적인 사료나 정황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안나 지로는 만토바에서 1710년 경에 태어났으며(1709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 부친은 나름 재력이 있는 이발사이자 가발 제조업자였다. 안나 지로는 부친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인데 위로는 20살 연상의 이복언니 파울리나 지로가 있었다. 사료 연구에 의하면 안나 지로는 1720~1723년에 이복 언니가 살고 있는 베네치아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베네치아에서 공부했다면  비발디가 교장이자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피에타 여학교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베네치아의 피에타 여학교는 음악교육의 수준이 높은 것으로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으며(이게 사실 비발디 덕분이다) 큰 규모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까지 갖추고 있어서 자주 공연을 했다. 이로 인해 피에타 여학교는 원래 고아원이었지만 비발디 당시에는 귀족이나 부잣집의 딸까지 입학하는 명문음악학교가 되어 있었다.  다만 비발디는 1718년부터 1725년까지 만토바에서 궁정악장으로 일하면서 피에타 학교에는 사실상 적만 걸어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발디가 직접 안나 지로를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다

안나 지로는 1723년 베네치아 근처의 도시 트레비소에서 가수로 데뷔한다. 그녀가 첫 출연한 오페라 '불행한 행운의 님프(La ninfa infelice e fortunata)'는 여러 작곡가의 곡을 짜깁기해서 만든 오페라인데, 이를 파스티치오(pasticcio)라고 하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상당히 유행하던 공연 방식이었다. 이듬해에 안나 지로는 베네치아에서 오늘날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유명한(실제로는 알비노니의 이름을 빌린 위작이다) 토마소 알비노니의 오페라 라오디케에 출연해서 호평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전업 가수가 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가 많게 잡아도 10대 중반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20살 많은 이복 누이 파올리나 지로가 일종의 매니저이자 보호자 역할(chaperone)을 했다. 두 자매의 이런 관계는 안나 지로의 가수 경력 후반기까지 유지된다. 

특이한 것은 안나 지로가 소녀가수였는데도 불구하고 음역대가 낮았다는 것이다. 여가수 입장에서 음역대가 낮은건 장점이 되기 어렵지만 한편으로 이런 목소리 덕분에 트라베스티 (travesti)에 매우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았다. 트라베스티는 여성이 오페라나 연극에서 성별을 바꾸어 남성 캐릭터로(또는 그 반대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뭐하러 이렇게 하나 싶겠지만 이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이슈를 만들기 좋기 때문에 드라마 분야에서 의외로 자주 행해지는 관습이었다(심지어 21세기에도 종종 행해진다).  안나 지로는 데뷔작에서 남성 캐릭터인 목동 역할을 했으며 한동안은 주로 트라베스티로 활동했다. 

안나 지로는 1726년 비발디의 오페라 템페의 도릴라(Dorilla in Tempe)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발디와 인연을 멪는다. 이 오페라에서 안나 지로는 조연인 님프 에우디미아로 출연했으며 오페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초연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은 것은 주인공 도릴라가 아니라 에우다미아였다. 저음 성향의 조연 가수가 주목을 받기는 정말 쉽지 않은데 이런 어려움을 뚫고  주목을 받은 것을 보면  특별한 매력이 있는 가수인 것이 분명하다.

템페의 도릴라 초연 팜플렛. 안나 지로 이름이 적혀 있다.


템페의 도릴라 오페라 자체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비발디 생전에 여러 번 재연됐다. 특히 1막에 나오는 에우다미아의 아리아 'Al mio amore il tuo risponda(내 사랑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는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이후에 비발디 본인을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이 다른 오페라에 자주 재활용했다. 당시는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하자.  안나 지로 본인도 아리아 디 볼레(aria di baule)가 요청되면 이 곡과 3막에 나오는 아리아 'Il povero mio core(처량한 내 마음)'를  많이 불렀다. 아리아 디 볼레는 오페라 무대에서 가수가 관객의 요청에 의해 원래 공연 계획에 없는 다른 곡을 부르는 것으로 이 역시 당시 오페라 공연에서 유행했던 관행이었다.

 

 

템페의 도릴라 중 에우다미아의 아리아 Al mio amore il tuo risponda

무엇보다 이 에우다미아는 작곡가 비발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발디는 안나 지로에게 매료되었고 이 오페라를 계기로 그녀를  자신의 가수로 만들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3. 비발디의 가수가 되다 

도릴라의 템페가 성공을 거둔 이후 비발디는 안나 지로를 자신의 전속 가수로 삼았다. 베네치아 외에 베로나 만토바 피렌체 등 이탈리아 내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오페라를 상연할 때도 항상 안나 지로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오페라에 출연시켰다. 안나 지로는 가수 커리어 동안 14개의 비발디 오페라를 초연했으며 재상연한 것까지 합치면 총 22개의 오페라에서 무대에 섰다. 

당대의 기록은 안나 지로에 대해 성량이 다소 작은 대신 서정적이고 우아한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표현력과 연기력이 훌륭한 가수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  비발디는 안나 지로의 목소리의 장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작곡했다. 또 같이 출연하는 여가수 때문에 안나 지로가 묻히지 않도록 다른 여자 배역의 음역대도 과하게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비발디의 오페라는 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비해 여가수들의 음역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안나 지로가 비발디의 음악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것이다. 

안나 지로가 불렀던 비발디의 모테주마의 아리아 La figlia, lo sposo m'affligge(딸과 남편이 나를 힘들게 하네)

비발디와 안나 지로의 음악적 밀월관계는 1738년까지 약 12년간 지속되었다. 다만 이 기간동안 안나 지로가 비발디의 오페라에만 출연한 것은 아니었으며 비발디의 모든 오페라에 출연한 것도 아니었다. 비발디 외에도 요한 아돌프 하세(헨델의 가수였던 파우스티나 보르도니의 남편이다)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출연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그녀의 노래 실력에 대해서는 대부분 호평 일색이다.  그리고 안나 지로는 비발디가 1741년 사망한 후에도 결혼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가수 생활을 지속했다. 

이런 경력만 살펴 보아도 안나 지로가 실력이 없이 비발디의 후광만으로 출세한 가수는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를 가장 잘 활용했던 작곡가는 분명 비발디였지만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이 있는 가수였다. 안나 지로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음역대가 낮은 것 때문에 빚어진 오해이거나 비발디와 연인이었다는 소문에서 파생된 편견으로 짐작된다.  

안나 지로가 훌륭한 가수였다는 증거가 하나 더 있는데, 그녀가 앞서 말한 아리아 디 볼레를 자주 불렀다는 것이다. 아리아 디 볼레는 무대에서 탁월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가수에게 관객들이 즉석으로 '당신이 잘하는 곡 하나 더 불러보세요'라고 일종의 장기자랑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비스(bis)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안나 지로가 디 볼레를 자주 요청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관객들을 사로잡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4. 비발디 이후의 안나 지로 

유럽클래스의 작곡가이자 베네치아 극장 흥행주로 잘나가던 비발디는 1737년 페라라에서 오페라 공연을 계획했다가 사실상 사기를 당하면서 이듬해에 재산을 대부분 날렸다. 어떻게 사기를 당했는지는 이야기가 상당히 길고 복잡하기 때문에 따로 글을 올리기로 하고, 여튼 이로 인해 비발디는 파산상태가 되었고 오페라 창작은 중단되었다. 안나 지로는 이 때 비발디를 떠나 한동안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서 활동한다. 다행히 비발디는 자신을 좋아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부름을 받고 재기를 꿈꾸면서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떠났다.  2년 정도 따로 지내던 비발디와 안나 지로는 빈으로 가던  비발디가 1740년 그라츠에 잠시 들렸을 때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때 비발디는 안나 지로에게 빈에서 다시 함께 음악을 하자고 했고 안나 지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비발디와 함께 빈으로 갔다. 

그런데, 비발디가 빈에 도착했을 때 카를 6세는 위독한 상태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당연히 그가 약속했던 황실음악가 임명도 물건너 가버렸다. 그나마 황위 계승이 순탄했으면 신임 황제에게 선황의 뜻을 받들어 달라고 말이나 해볼 수 있었을텐데, 카를 6세가 죽자마자 황위를 놓고 분쟁이 생기면서 전쟁이 발발해 버린다;;;;;;   7년 넘게 벌어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 - 1748)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베네치아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베네치아에서 그나마 돈이 될만한 것을 모두 처분하고 어렵게 여비를 마련해서 빈에 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연속적으로 악재가 터져버리자 실의에 빠진 비발디는 지병이었던 천식이 악화되면서 1741년 빈에서 사망한다. 
 

빈에 있는 비발디의 묘지석


한편 비발디와 함께 빈에 온 안나 지로는 빈에서 비발디의 오페라를 공연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발디 사후에도 일정 기간 빈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에는 이탈리아로 복귀해서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이 때부터는 비발디나 하세와 같은 바로크 오페라 작곡가 대신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나 갈루피(Baldassare Galuppi)같은 초기 고전파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주로 출연했다.

1748년 공연을 위해 피아첸차에 잠시 와 있던 안나 지로는 피아첸차의 토박이 귀족이었던 란디 가문의 안토니오 란디의 구애를 받게 된다. 란디는 베네치아까지 쫓아와서 안나 지로에게 청혼했다. 결국 결혼은 성사되었는데 다만 신분의 차이로 인해 비밀리에 결혼이 진행됐다. 결혼 직후 안나 지로는 가수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살았던 탓에 은퇴 후 그녀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5. 비발디와 안나 지로는 연인이었나?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이게 가장 궁금했을 것이다. 과연 안나 지로는 비발디에게 음악적 동료를 넘어선 존재였을까?

일단 비발디와 안나 지로는 30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비발디와 안나 지로가 밀접하게 음악활동을 하자 두 사람이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소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비발디의 경쟁자들이 이런 루머를 자극적으로 확대재생산해서 퍼뜨렸다.  물론 비발디는 이런 루머를 적극 부인하면서 언니 파올리나 지로가 항상 안나 지로를 따라다니는데 그게 가능하겠냐고 항변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파올리나 지로는 동생의 보호자이자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천식으로 고생하는 비발디를 간호하고 가사를 돕는 일도 했다. 지금 관점에서는 이게 무슨 노동력 착취냐 싶겠지만 비발디 당시에는 여성 가톨릭 신자들이 공덕 쌓기의 일환으로 가톨릭 사제들의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비발디가 이렇게 해명을 하자 이게 또 왜곡이 되서 이제는 비발디가 두 자매와 동거를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 비발디가 날라리 성직자라는 세간의 이미지도 이런 괴소문이 만들어지는데 한몫 했다. 하지만 비발디는 음악 때문에 사제업무를 게을리 하긴 했어도 문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피에타 여학교에 30년간 재직했지만 한 번도 남녀관계로 인한 추문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었지만 유흥이나 도박 따위에 돈을 탕진하지 않고 가족들을 잘 보살폈다.  그는 성직자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사제 직함을 유지했는데 그가 베네치아의 유명인사인데다 교황청에서 그와 관련된 소문을 딱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발디의 바순 협주곡 자필 악보. 비발디는 엄청난 속필 속작으로 유명했다.

 
이처럼 안나 지로와의 염문설은 그 당시에도 그냥 가십거리일 뿐이었는데, 앞서 이야기한 1737년의 페라라 프로젝트 사기 사건에서 결국 문제가 되었다. 당시 페라라의 추기경이었던 루포(Ruffo)는 비발디처럼 어린 가수와 염문을 뿌리는 타락한 성직자의 오페라는 페라라에서 공연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당연히 비발디는 절대 아니라고 열심히 해명을 했지만 추기경의 딴지는 공연을 무산시킬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고 결국 페라라 공연은 열리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건 이런 공방이 오가는 와중에도 안나 지로는 페라라에서 아무 문제 없이 비발디 오페라를 공연했다는 것;;;;;  결국 페라라가 싫어했던건 비발디의 오페라가 아니라 비발디같은 외부인이 돈을 챙겨가는게 아니었을까 싶다. 

각설하고, 결론적으로 비발디와 안나 지로가 사귀었다는 이야기는 헛소문 이상으로 진지하게 볼만한 증거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래도 남녀가 12년씩이나 저렇게 밀접하게 같이 일했는데 정말 아무 일이 없었을까?' 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진실 여부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모든 자료와 정황은 두 사람이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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