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에서 첫번째로 다룰 연주자로 발렌티나 리시차(Valentina Lisitsa)를 선정했는데, 이유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주 듣는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1973년생으로 우크라이나 태생 미국인 피아니스트이다.
1. 리시차의 생애
1-1 초기와 무명 시절
1973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키이우에서 태어났으며 일찌감치 음악에 재능을 보여서 리센코 음악 학교에서 본격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리시차는 악보에 대한 독보 능력과 암기 능력이 정말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데 이미 이 시절부터 이 재능이 돋보였다고 한다. 18살인 1991년에 미국으로 왔으며 이듬해에 같은 음악학교에 다니던 알렉세이 쿠즈네초프(Alexei Kuznetsof)와 결혼했다. 19살에 일찍 결혼했지만 다행히 2024년 현재까지도 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
미국에 온 리시차는 이후 15년 넘게 무명 시절을 겪어야 했다. 유명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도 없고 거장 연주자에게 사사받거나 추천을 받은 적도 없으며 영어도 서투른 동구권 연주자에게 관심을 갖는 공연기획사나 음반사는 없었다. 그나마 1996년부터 Audiofon에서 Virtuosos Valentina!를 비롯해서 몇 장의 음반을 발매했는데 오디오폰이 마이너 레이블이었던 탓인지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리시차가 유명세를 탄 현재에는 이 시절의 음반들이 레어템으로 나름 관심을 받고 있으며 특히 자신의 남편이자 피아니스트인 알렉세이 쿠즈네초프와 함께 연주한 2중주 음반은 들어볼만 하다.
당시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행사에서 연주 알바를 하거나 유명 현악기 연주자나 성악가의 반주자로 활동했으며 한때 피아니스트를 그만두고 CIA의 동구권 문서 담당 공무원으로 취직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1-2 유튜브 영상으로 대박을 치다
이처럼 그저 그런 피아노 연주자로 지내던 리시차는 2007년 유튜브에 자신이 연주한 24곡의 쇼팽 연습곡 영상을 올렸는데 이게 말 그대로 신의 한수가 되었다. 늘씬한 미녀 연주자의 힘에 넘치는 연주 영상은 무려 수백만뷰를 기록하면서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유튜브는 생긴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사이트라서 지금처럼 사용자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수백만뷰는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후 이 영상은 1억뷰를 넘겼는데 아쉽게도 2024년에 현재는 이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없다. 이 영상이 DVD로 발매 되면서 저작권이 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신 그녀가 올린 또 하나의 대박영상이 있는데 바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영상. 다행히 이 영상은 현재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쇼팽 연습곡에 이어서 올린 이 월광소나타 영상 역시 엄청난 조회수를 찍으면서 스타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알렸다
유튜브 대박으로 고무된 리시차는 계속해서 유튜브에 자신의 연주영상을 올렸고 동시에 유명세도 계속 높아졌다. 200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개인 리사이틀을 개최하기 시작했고(이 때 한국에도 왔다) 2010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같은 유명 악단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고 음반도 발매했다. 2012년에는 메이저 레이블 중 하나인 데카(Decca)와 전속계약을 맺고 꽤 많은 음반을 출시했으며 2022년부터는 나이브(Naive)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길었던 무명 시절을 보상받고 싶었는지 유명해진 이후 굉장히 활발하게 연주회와 레코딩을 병행하고 있으며 이런 왕성한 활동은 50살이 넘은 2024년에도 현재진행중이다.
리시차는 한국과도 상당히 친한 연주자이다. 애초에 유튜브에서 얻은 인기의 상당부분이 한국의 클래식 팬들로부터 나온 것이며 리시차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리시차는 유명해진 직후인 2008년에 바로 한국에 내한했으며 2015년부터 2021년까지는 거의 매년 한국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종종 3시간이 넘는 공연에 엄청난 앙코르까지 소화하면서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아쉽게 2021년 공연 이후에는 내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는데 조만간 그녀를 한국에서 다시 보기를 희망한다.
1-3 친러 성향
연주자로서의 명성과 별도로 리시차는 우크라이나 출신답지 않은 친러성향으로 유명하다. 아니, 악명이 높다. 2014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내전에서는 우크라이나 동부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친러시아 성향의 반군의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때문에 러시아를 싫어하는 지휘자나 연주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켰고 심지어 이로 인해 연주회가 취소되기도 했지만 이런 손해에도 불구하고 정치성향을 감추지 않고 있다. 다행히(?)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특별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고 말을 아끼고 있는데, 만약 이런 분위기에서 계속 러시아편을 든다면 연주 및 음반 활동을 계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22년 이후 한국에 오지 않고 있고 2023년에는 내한공연이 예정됐다가 취소된 적이 있는데 이것도 러-우 전쟁의 여파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2. 연주 스타일
'건반위의 검투사', '여전사'라는 별명답게 웬만한 남자 피아니스트 못지 않은 속주와 박진감이 느껴지는 강력하고 빠른 타건을 특징으로 한다. 그 덕분에 빠르고 강력한 음향을 지닌 곡에서는 그녀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다. 대신 강성 일변도의 타건으로 인해 음향이 대체적으로 건조하고 서정미가 약해서 느린 곡이나 우아함이 강조되는 곡에서는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쇼팽 연습곡 영상을 보면 방금 이야기한 그녀의 장점과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이런 약점이 많이 개선되어 좀더 여유있고 원숙미가 느껴지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2022년에 발매된 스크리아빈 곡을 담은 음반 'Scriabin'에서는 오히려 빠른 곡보다 느린 곡의 연주가 더 훌륭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연주할 때의 몸짓과 타건 스타일도 그녀의 유명세에 일조를 했다.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음악에 몰입해 있는 듯한 특유의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또 위의 월광 소나타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리시차는 일반적인 피아니스트들과 달리 손가락을 거의 구부리지 않고 곧게 편 상태로 연주하는데 이 펼친 손가락은 리시차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이다. 피아니스트에게 어울리는 길고 유연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가락을 편 상태에서도 충분한 타건력과 움직임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베토벤,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등 피아노 분야에서 유명한 작곡가와 음악을 위주로 연주했지만 점점 레퍼토리를 확대하고 있다. 2015년부터 필립 글래스, 스크리아빈, 차이코프스키등의 음반을 발매했고 2020년에는 이탈리아의 현대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의 곡을 담은 Le Onde를 발매하기도 했다. 또 베토벤 이전의 바로크 시기나 고전파 시기의 작곡가는 자주 연주하지 않았는데 2023년에 바흐의 곡을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3. 들어볼만한 음반
개인적으로 그녀의 음반을 모두 모으려고 하다가 포기했는데 첫 번째로 그녀의 음반이 너무 많고 두 번째로 돈이 없기 때문이다.ㅠㅠ 이처럼 음반을 모을 엄두가 안날 정도로 리시차는 음반 발매에 적극적인 연주자 중 한명이다. 전집도 두개나 냈는데 2019년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곡 전집, 2020년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냈다. 베토벤 소나타 전집은 워낙 많기 때문인지(유명 연주자들이 통과의례처럼 거치는 레퍼토리이다보니)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곡 전곡 앨범은 대중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상당한 관심을 받았으며 평도 꽤 좋았다. 아쉽게 차이코프스키 전집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추후에 꼭 들어보고 싶은 음반 중 하나이다.
중요한 음반은 나중에 따로 글을 올려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여기서는 개략적인 것만 이야기한다.
3-1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 파나니니 광시곡(2013)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소시적 리시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음반이다. 특유의 강력한 터치와 화려한 기교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3-2 Listsa Plays Liszt(2013)
리스트 연주 음반인데 물론 연주는 훌륭하지만 선곡의도를 잘 모르겠다. 특별한 선곡 컨셉도 보이지 않고 수록된 9곡중 7곡이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곡이다. 아마 리시차 본인이 좋아하는 곡으로 구성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마왕 편곡이 있어서 구매한 음반이다
3-3 Nuances(2015), Scriabin(2022)
리시차는 2015년과 2022년에 각각 스크리아빈 음반을 발매했다. 7년의 시간동안 그녀의 연주성향이 어떻게 변했을지를 염두에 두면서 들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3-4 Lisitsa - 1908(2022)
음반 제목답게 1908년 같은 해에 작곡된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이 수록되어 있다. 밤의 가스파르 연주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개인적으로는 호) 피아노 소나타 1번 연주는 정말 훌륭하다.
3-5 Listsa - Chopin(2022)
그녀의 출세 영상(?)인 2007년 쇼팽의 연습곡 영상과 이 앨범을 비교해 보면 15년이 지난 후 그녀의 스타일 변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젊은 시절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지고 많이 풍성해졌다.
3-6 Listsa - Philip Glass(2015)
2개의 CD로 되어 있다. 단순한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는 필립 글래스의 음악을 리시차가 어떻게 연주할지 관심을 끌었던 음반인데 기대에 걸맞게 꽤 설득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3-7 Lisitsa - Love Story(2016)
특이하게 영화에 등장하는 피아노곡(주로 관현악과 협주)을 수록한 음반이다. 본격 감상보다는 기분전환이나 힐링용으로 추천하고 싶은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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