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초보적인 음향 이론을 다루었다. 이번에는 이어폰/헤드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혹시 이 글 내용 중에 잘 모르는 용어나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 있다면 꼭 지난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1. 이어폰/헤드폰의 주파수 응답곡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음향기기는 필수이다. 최근에는 아웃도어에서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무선 이어폰과 헤드폰이 대거 출시되면서 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더욱 좋아졌다. 하지만 음향 기기 초보자라면 그 많은 이어폰과 헤드폰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구입할 때 신경써야 할 사항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하우징의 모양과 재질, 발음체의 종류 및 재질과 크기, 임피던스, 감도, 디자인, 착용감 등등.....이 모든걸 신경쓰게 되면 무조건 결정장애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이어폰과 헤드폰을 고를 때는 일단 기기의 성향이 자신이 취향에 맞는지 여부부터 확인할 것을 권한다(물론 이것보다 더 중요한게 가격이지만 ㅠㅠ). 이것만 확인해도 선택의 폭을 크게 좁힐 수 있다. 이 때 기기의 음성향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주파수 응답곡선이다. 주파수 응답은 과학/공학 용어이지만 이어폰과 헤드폰 관점에서 보면 기기에 특정 주파수의 음을 입력했을 때 기기의 출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주파수의 변화에 따른 출력의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가 바로 주파수 응답곡선이다. 아래 주파수 응답곡선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Etymotic사의 ER4XR이라는 이어폰의 주파수 응답곡선이다.
주파수의 입력과 출력의 측정은 전용 측정장비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렇게 얻어진 그래프를 raw 응답 곡선이라고 한다. raw라고 표현한 것은 아무런 보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raw 곡선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사람의 귀는 주파수에 따라 민감도가 틀리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귀에서 느끼는 출력과 측정장비를 통해 얻은 출력값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귀 민감도를 고려해서 얻어진 그래프를 보정하게 되는데, 이 보정에 사용되는 것을 타겟 곡선이라고 한다. 이 타겟 곡선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2024년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타겟 곡선은 음향기기 회사 하만(Harman)에서 만든 하만 타겟이다. 이 하만 타겟은 만든 사람 이름을 따서 올리버-웰티 타겟 또는 OW 타겟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타겟 곡선을 통해 보정한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파수 응답 곡선이고 보통 이 곡선을 바탕으로 음향기기의 성향을 판단하게 된다. 위에 있는 ER4XR 이어폰의 raw 주파수 응답곡선을 Harman 타겟으로 보정하면 아래와 같은 응답곡선을 얻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타겟 곡선은 어디까지나 이론과 평균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마다 편차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주파수에 대한 민감도가 다 틀리다. 인종마다 틀리고 성별마다 틀리고 나이에 따라 틀리고 귀 모양에 따라 틀리다. 그래서 최근의 타겟 곡선은 객관적인 민감도를 반영하는 대신 사람들의 선호도, 즉 사람들에게 좋게 들리는 음향을 예상해서 만들고 있다. 혹시나 본인이 평균과 크게 다른 청각 민감도를 가지고 있거나 음악 취향이 매우 독특하다면 어쩔수 없이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 귀에 맞는 음향기기를 찾는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주파수 응답 곡선 자체에도 한계가 있다. 이 곡선은 음향특성을 최대한 직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세세한 정보를 생략했기 때문에 음향기기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응답 곡선은 기기의 해상도나 음분리도 등의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또 일부 저가형 기기에서 아주 좁은 영역의 특정 주파수대에서 출력이 확 줄어들던가 반대로 확 튀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현상은 응답 곡선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응답 곡선만 보고 마음에 들어서 구매했다가 막상 들어보면 깨끗하지 않고 불편한 소리가 나와서 당황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응답 곡선의 해상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아주 좁은 영역의 결함은 잘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음향 전문가들이 주파수 응답 곡선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주파수 응답 곡선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으며 기기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자료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참고로만 활용해야지 이걸로 음향기기 자체의 품질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종종 응답 곡선만 보고 이 기기가 좋다 나쁘다 섣불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자신의 음향 지식이 매우 짧다는 걸 셀프 인증하는 것이다.
2. 주파수 대역별 음향의 용도와 느낌
앞서 말한 것처럼 응답 곡선은 많은 약점이 있지만 그래도 기기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나름 유용하기 때문 충분히 참고할 가치는 있다. 음향기기에서 나오는 음향은 주파수대 별로 나름의 특징과 느낌을 갖고 있다. 아래의 내용을 참고해서 응답 곡선에서 상대적으로 어느 영역이 강조되고 어느 영역이 들어가 있는지를 보면 대략적으로 이 기기가 저음 성향인지 고음 성향인지, 보컬이 강조되는지 악기가 두드러지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1) 초저음(Sub Bass): 60Hz 이하
이 영역에서 음을 내는 클래식 음악 악기는 많지 않으며(콘트라베이스, 피아노, 파이프 오르간 정도) 구체적인 소리나 음보다는 일종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 영역이 강조되면 웅장한 느낌이 나지만 대신 소리의 청량감이 떨어지고 탁하게 들리기 때문에 음악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한 영화나 게임 사운드에서 많이 강조된다. 다만 이 대역에는 잔향음의 성분이 많이 포함되기 때문에 라이브 음원을 편집할 때는 현장감을 높이기위해 이 대역을 살려준다.
(2) 저음(Bass): 60~250Hz
이 영역은 각종 타악기를 비롯한 저음 악기와 남성 보컬의 주요 음역대로 흔히 말하는 저음의 타격감이 이 영역에서 나온다. 이 부분이 강조되면 전체적으로 음이 어둡고 무겁게 들리며 반대로 너무 약하면 깊이가 없고 가볍게 들린다. 이어폰이나 헤드폰은 스피커에 비해 발음체가 작아서 초저역대를 내기 힘들기 때문에 저음을 살리기 위해 이 영역을 많이 강조한다.
(3) 중음(Midrange): 250Hz~2kHz
대부분의 악기와 여성 보컬의 기음(基音)이 이 영역대에 걸쳐있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다른 음악도 마찬가지)에서 가장 소리의 밀도가 높은 영역대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영역 중에 가장 많은 소리가 등장하는 영역이다. 때문에 이 부분을 무작정 강조하면 다른 음역대의 소리가 안들리는 마스킹 현상이 발생하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거의 전화 통화 수준의 소리가 난다. 이런 이유로 중역대는 보통 고음이나 저음에 비해 약간 낮추는 쪽으로 튜닝을 한다.
(4) 중고음(High Mids): 2~6kHz
사람의 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역대로(특히 3~4kHz) 여러 악기의 고음역대가 이 영역에 걸쳐 있다. 또 중음역대에서 등장한 기음의 배음이 이 영역에서 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음색과 가장 관련이 깊은 영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제조사들은 각 목소리와 악기의 음색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이 영역을 가장 공들여서 튜닝을 한다. 또 3kHz 영역은 보컬의 존재감과 관련이 높은데, 이 부분이 강조되면 보컬이 좀더 선명하게 들리고 반대로 너무 약하면 보컬이 배경음처럼 들리는 백킹 현상이 발생한다.
사람에게 가장 잘들리는 음역대이기 때문에 이 영역의 출력이 크면 피곤하게 느껴지고 청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5) 고음(High): 6~10kHz
스네어 드럼, 심벌즈, 하이햇 등 특정한 악기의 소리나 특수한 음향 효과 등이 이 영역에 포함되며 음의 선명함과 분리도가 이 영역과 관련이 깊다. 이 부분이 강조되면 소리가 밝고 해상도가 좋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너무 과하면 중고음의 출력을 높일 때와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소리가 나와서 쉽게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또 치찰음이 발생하는 영역이 바로 이 고음역대이다. 치찰음의 발생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영역이 강조되면 치찰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확실히 높아진다. 다만 치찰음은 기기 외적인 이유로도 발생하며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이퀄라이저로 이 대역의 출력을 조절해서 치찰음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6) 초고음: 10kHz 이상
이 영역은 초저음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소리보다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영역까지 소리를 내는 악기는 거의 없지만 이 영역에서 발생하는 배음은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초저음이 웅장함과 묵직함을 제공한다면 초고음은 공간감, 개방감, 밝은 분위기 등을 제공해서 이 영역이 강조되면 넒은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는 느낌이 든다. 이 영역이 너무 강조되면 소리가 산만해지고 반대로 과하게 줄이면 상당히 답답한 느낌이 든다.
나이에 따라 음향기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이유가 주로 이 영역 때문인데, 나이가 들수록 가청 고음 한계가 낮아지면서 초고음의 청취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는 넓은 스테이징이 느껴지는 음향기기도 나이든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들릴 수 있다.
3. 주요 이어폰/헤드폰 성향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현재 시장에 출시된 이어폰과 헤드폰을 몇 가지 성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여기 이야기한 것 말고도 독자적인 성향을 가진 기기도 많이 있는데 큰 틀에서는 대체로 아래 3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 플랫 성향
타겟 커브(주로 하만 타겟 커브)에 최대한 가깝게 맞춘 성향으로 착색이 없는 자연스러운 음향을 들려준다. 즉, 플랫 성향의 이어폰/헤드폰은 음반이나 영상을 제작한 프로듀서들이 작업한 결과물, 즉 원음을 왜곡 없이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 목표이다. 또 음향 작업자들이 사용하는 모니터링용 이어폰/헤드폰도 모두 플랫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녹음된 원음을 최대한 왜곡 없이 들으면서 편집을 해야 제대로 된 음향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타겟 커브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으로 설정한 기준이며 사람마다 다 청각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완벽하게 원음을 재생하는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단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준에서 최대한 왜곡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된 기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2) V 성향
플랫 성향은 원음을 충실하게 재생하는 장점이 있는 대신 듣는 즐거움이 좀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음원과 음반은(특히 클래식 분야는) 다양한 기기에서 재생되는 것을 감안해서 제작되기 때문에 작업 단계에서 특정 영역을 강조하거나 축소시키기 보다는 최대한 무난하게 편집을 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플랫성향으로 음악을 들으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음악을 좀더 즐겁게 듣기 위해 특정 음역대를 강화시키는 튜닝이 등장했는데 이게 바로 V 성향이다. 대략 200Hz 이하의 저음과 3kHz 이상의 고음을 동시에 강조하기 때문에 V 성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기기는 저음역대에서는 강력한 타격감을 느낄 수 있고 고음역대에서는 밝고 선명한 음이 나오기 때문에 들을 때 상당히 흥이 난다. 그래서 이 V 성향을 펀사운드(fun sound) 성향이라고도 한다. 본인이 플랫 성향의 기기를 선택할 것인가 V 성향의 기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뭐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취향의 문제이다. 착색 없이 최대한 원음에 가깝게 듣겠다고 하면 플랫 성향 기기를 선택하면 되고 좀더 흥겹고 감동적인 사운드를 추구한다면 V 성향 기기를 선택하면 된다.
한편으로 저음과 고음을 모두 높이는 대신 저음과 고음 중 한쪽만을 강조한 기기도 있다. 이 역시 본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3) W 성향
앞서 V 성향에서 저음과 고음을 동시에 강조한다고 했는데 그럼 중음이 상대적으로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강한 V 성향의 이어폰/헤드폰은 중음이 다소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W 성향이다. 저음과 고음 뿐만 아니라 대략 500~1000Hz 영역의 중음역도 부스팅해서 고중저음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중음역은 소리의 밀도 자체가 높아서 조금만 높여도 주변 음역대를 마스킹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제대로 튜닝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시중에 잘 팔리는 이어폰 가운데 강한 W 성향을 가진 이어폰은 많지 않으며 설령 출시가 되도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 때문에 시중에서 인기 있는 W 성향 이어폰은 중음역을 살짝만 강화시킨 약W 성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성향을 가진 이어폰/헤드폰이 있다. 특히 100만원이 넘어가는 고가의 기기에서는 독자적인 타겟 곡선과 튜닝 노하우를 바탕으로 본인들만의 특별한 사운드를 구현하기도 한다. 다만 이런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따로 다루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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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클래식 팬들에게는 어떤 성향이 어울릴까? 당연히 정답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플랫 성향을 추천하고 싶다. 클래식 음악은 새로운 작곡가가 쏟아져 나오는 분야가 아니라 새로운 연주자가 쏟아져 나오는 분야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들이 각자의 해석과 연주 방법으로 새롭게 표현하는 분야이다. 이런 경우라면 가급적 착색 없이 각 연주자가 구현하고 있는 연주 방식과 음향을 원음 그대로 듣는게 좀더 객관적으로 비교평가하는 데 좋을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본인만의 힐링과 감동을 얻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면, 또는 자신이 정말 선호하는 사운드 취향이 있다면 V 성향이나 W 성향 등도 정말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선택에 좋고 나쁜건 없다. 취향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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